그리스 신화에서 예술과 역사를 관장하는 아홉 명의 무사이(뮤즈) 여신 중 한 명인 에라토(Erato)에서 이름을 딴 에라토는 1992년에 워너 뮤직에 합류하기 훨씬 전인 1953년부터 방대한 카탈로그를 쌓아 올렸던 프랑스의 명문 레이블이다. 본래 프랑스 음악에 주력하기 위해 만들어진 레이블답게 초창기부터 독특한 색깔을 드러냈으며, 이런 개성은 국제적인 레이블로 성장한 다음에도 꾸준하게 유지되었다. 이번에 출시되는 박스 에디션을 보면 역시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연주자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에라토에는 장-프랑수아 파이야르(지휘), 마리-클레르 알랭(오르간), 모리스 앙드레(트럼펫), 장-피에르 랑팔(플루트), 릴리 라스킨(하프)이 남긴 가장 위대한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앙드레의 바로크 트럼펫 협주곡집, 알랭의 바흐, 풀랑크, 프랑크, 뒤뤼플레 오르간 작품집, 라스킨과 랑팔, 파이야르가 만난 모차르트 협주곡집은 특히 잊을 수 없는 명연이다. 한편 에라토 레이블의 또 다른 두 축은 바로크-고음악과 (프랑스) 현대 음악이었다. 에라토 레이블이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보유했던 고음악 연주자들은 존 엘리어트 가디너, 톤 코프만, 윌리엄 크리스티, 마르크 민코프스키 등 그야말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이번 에디션에 수록된 연주로는 그라모폰상을 수상하며 민코프스키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스트라델라의 <세례자 성 요한>, 영국 바로크 음악 해석의 새로운 기준을 정립한 크리스티의 퍼셀 <아더 왕>과 지금까지 동곡의 절대 명연으로 남아있는 샤르팡티에의 <메데>, 가디너 초창기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캉프라의 레퀴엠과 글루크 <아울리드의 이피게니>, 코프만의 눈부신 오르간 즉흥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헨델 오르간 협주곡집, 그리고 비운의 천재, 스코트 로스의 하프시코드 작품집을 꼽고 싶다. 현대 음악에서도 중요한 기록이 많은데, 특히 올리비에 메시앙과 피에르 불레즈, 모리스 뒤뤼플레의 자작자연집은 예술적인 가치와 역사적인 중요성을 겸비한 기록이라고 할 만하다. 또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면도날같은 합주력을 엿볼 수 있는 러시아 관현악곡집과 젊은 날의 피레스, 그뤼모 역시 반가우며, 조수미의 비르투오조 아리아집이 들어있다는 점도 각별한 감흥을 준다.